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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매거진

[김형국] 가을 스케치

By 성산매거진

가을 스케치

 

김형국 (대구문화예술회관장)

 

 

지난여름 꺾일 것 같지 않던 더위도 8월 하순으로 접어들자 아침저녁으론 눈에 띄게 누그러졌다. 9월 들어서는 새벽 잠자리 때 열린 창으로 스며드는 서늘함에 이불을 절로 끌어당기게 된다. 이런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싶던 차, 딸의 초대(?)로 추석날 오후에 백패킹을 떠났다. 목적지는 합천 대암산, 이곳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유명하단다. 그리고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화장실, 샤워장 등 제반 시설이 잘 갖춰진 곳으로 가는 줄 알았으나 이곳은 그런 곳이 아니란다. 그래서 오히려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따라나섰다.

 

초가을 오후, 아직은 여름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길가에 늘어선 들녘과 먼 산은 벌써 가을색이 제법 짙어졌다. 창을 열고 달리는 시골길은 불어오는 바람과 고즈넉한 풍경에 절로 콧노래가 나올 만큼 평화롭고 정겹다. 이윽고 저 멀리 병풍처럼 들판을 둘러싸고 있는 대암산이 나타났다. 산세는 전혀 다르지만 작은 구릉도 없이 논밭 끝자락부터 곧장 산으로 이어지는 모양새가 월출산 같기도 했다. 시멘트로 포장은 되어있으나 좁고 가파른 길을 차로 한참이나 올라가야 목적지 부근이 나온다.

 

과연 대암산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사랑받는 만큼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오고 있다. 우리가 찾은 날은 평소보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패러글라이딩 순서가 밀려 오후 늦게까지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순서가 끝나야 텐트를 칠 수 있기에 그동안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 지형은 먼 옛날 운석 충돌의 영향으로 형성된 `운석공`이라더니,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정말 실감 할 수 있다.

 

 

이윽고 해가 이슥해져서야 야영 준비를 했다. 바람이 불어 약간 애를 먹긴 했지만 요즘 텐트는 설치가 정말 간편하다. 두 대의 텐트를 치고 저녁을 간단히 준비했다. 화식(火食)은 금지라 물을 이용한 발열 기구와 간편식으로 제법 근사한 저녁상을 차렸다. 비록 세찬 바람을 맞아야 하지만 산 중에서 의자와 테이블까지 갖추고 딸과 함께하는 만찬은 최고라 할만 했다. 물론 반주(飯酒)도 빠트릴 수 없는 일, 그러는 사이 해는 지고 달이 떠오를 기세였다. 얼른 저녁상을 정리하고 본격적으로 멍 때리는 시간을 가졌다. 바람도 많이 불고, 산 중 날씨라 한겨울 파커로 몸을 감싸고 자리를 잡았다.

 

 

지난 추석은 100년 만의 가장 둥근달이었다. 구름 사이로 한 조각, 때로는 둥글게 숨바꼭질하듯 비치는 월출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같다. 밝은 달빛 아래 흰색 양떼구름과 두텁게 둘러쳐진 검은 구름의 조화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달은 점점 높이 떠오르고 밤은 깊어간다. 달과 구름이 비경을 선사하는 동안 머리 위 하늘엔 구름이 씻겨가고 검푸른 하늘에 별들도 점점이 나타난다.

 

 

 

밤이 깊어 보금자리로 들었다. 가장 평평해 보이는 자리를 골랐으나 아무래도 바닥이 고르지 않아 뒤척이게 되고, 밀려드는 한기와 밤새 부는 바람에 심하게 펄럭이는 텐트 소리로 인해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밤이었다. 그러나 텐트 안은 그야말로 나만의 공간이 아닌가. 세상의 온갖 것으로부터 보호받는 온전한 나의 보금자리. 아이들이 조그만 다락방을 찾듯, 춥고 불편한 작은 텐트에서 어린 시절의 다락방에서와 같은 아늑함과 안도감을 느낀다.

 

 

 

이윽고 여명이 비치기 시작했다. 텐트 밖을 나서니 드넓은 들판 저 너머 동쪽 하늘엔 붉은 기운이 번져 나온다. 바람은 새벽에도 여전하다. 간밤의 월출과 마찬가지로 구름 사이로 태양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구름이 깔려있음으로 해서 연출되는 신비스러운 일출이 장관이다. 밤새 한기에 노출되었다가 새벽바람까지 맞으니 추위가 몸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딸이 익숙한 솜씨로 끓여준 숭늉은 언 몸을 녹여 줄 뿐만 아니라 가슴 가득 사랑까지 채워준다.

 

까까머리 학생 때 산악반 생활을 짧게 했고, 유학 시절에도 방학이면 가족과 함께 캠핑을 자주 다녔다. 요즘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프로그램의 무대가 우리가 다니던 곳과 겹친다. 큰 경비를 들이지 않고도 야외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그땐 참 많이도 다녔고 가족 모두 그때 추억이 한 아름이다. 그리곤 오랫동안 캠핑의 재미를 잊은 채 살다가 이번에 딸 덕분에 다녀올 수 있었다. 백패킹이란 한마디로 자유로움이다. 공간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에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머무는 동안 자연의 변화는 예민하게 몸으로 느끼지만, 반면에 생각은 단순해지고 머리는 비울 수 있다. 몸이 불편할수록 마음은 편해지는 곳, 바로 자연 속에 있다. 길을 떠나야겠다.